길 위에서...여행기, 풍경

천당과 지옥을 오갔던 대청봉

바이올렛~ 2006. 10. 11. 13:58

 

 

"이번 주에 대청봉이나 따라가 볼까?"

지난 주 초쯤 아무렇지도 않게 툭 던지는 말에 걸려들어 별 생각없이

"그래볼까" 하고 대답했던게 무지한 고생을 자초할 줄 미처 몰랐다.

물들어가는 단풍으로 아름다움의 절정에 들어 있을 대청봉에서

가을을 맞는다는 설레임만을 품은 채 많은 사람들을 따라 쉬엄쉬엄 가면 되겠지 했었다.

몇달 간 산행을 쉰 터에 어려울 거란 생각을 왜 못했었는지...

  

 

 

토요일 밤 10시 반의 당산역.

도중에 취소한 세 사람을 빼고 두대의 차량에 사람을 꽉 채운 버스가

드디어 대청봉으로 출발했다.

처음 따라가보는 산악회인지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산행 개요에 대한 운영진의 설명이 있은 후 소등하고 잠들을 청하는데 잠이 잘 안 온다.

잠을 거의 못 잔 상태에서 인제휴게소에 도착, 새벽 2시쯤 조식이 주어졌다.

배가 고픈 것도 아니고 밤참이란 걸 먹어 본 적이 없어 안 먹을까 했더니

점심 먹을 때까지 장장 몇 시간을 굶으며 산행하기엔 힘들거니 먹어두라 해

국물에 말아서 몇 숟갈 떠 먹었다.

 



다시 버스를 타고 구비구비 한계령 길을 올라간다.

지난 여름 된통 수해를 입은 한계령은 그 동한 복구 공사로 통제돼오다

단풍시즌과 추석을 맞아 불철주야 공사한 덕으로 이번에 임시 개통이 됐다 한다.  

그런데 아까 먹은 밥이 잘못됐을까.

구불거리는 길에 속이 울렁거리며 멀미가 확 일어난다.

앞 좌석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눈 감은 채 참고 견디자니 식은땀이 쫙 난다.

 


 

드디어 대청봉 매표소에 도착해 공룡능선을 타는 회원들은

1시간 가량 더 버스를 타고 가야 하기에 자리에 남고,

대청봉에 오르기로 한  사람들만이 버스에서 내려

오색약수터 들머리에 들어서니 이때가 새벽 세시다.

사방은 깜깜하고, 뱃속은 전쟁을 치러내느라 말이 아니고

내가 이 산행을 제대로 치러낼까 겁이 난다.

이제서야 현실을 바라보는 나의 아둔함이라니...

 



몇 번 등산을 해 본 경험에 의하면 항상 처음이 힘들다.

좁은 좌석에서 몇시간을 불편하게 오던 몸이

미처 준비자세를 취하기도 전에 오르막길을 오르느라면

숨이 턱에 차고 금방 지쳐버린다.

오늘은 속도 안 좋은 터라 힘들어지면 생목이 올라오며

어질어질 쓰러질 듯해 자꾸 쉬어가게 된다.

그렇게 되니 산악회에서 꼴찌는 말할 것도 없고

뒤이어 따라오는 몇개의 산악회원이 앞질러 가는걸 그냥 구경할 수밖에 없다.

사방은 어둠 속에 쥐 죽은 듯 고요하고

들리는 건 스틱으로 바닥을 짚으며 돌에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일행들이 두런두런 주고 받는 몇마디 말들 뿐...

 



올라갈수록 자꾸 뒤쳐지면서 여러 산악회와 뒤엉켜져 정체가 심해진다.

멈춰 서 있는 시간이 많아지니 잠을 못 잔 눈에 졸음까지 몰려온다.

뭐라도 구경할 수 있으면 덜할 텐데 어둠 속에 보이는 것은

꼬리에 꼬리를 문 랜턴 불빛과 폭포에서 쏟아져 내리는 세찬 물소리 뿐,

심심하기까지 하다.

 


 

여섯시쯤 되면서 주위가 차츰 밝아 온다.

너무나 많이 쉬어가며 오른 탓에 정상은 아직도 먼데

단풍으로 물들기 시작한 나무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여리고 고운 빛으로 막 채색되어가는 나뭇잎이 아침 햇살 속에서 더욱 싱그럽다.

정상으로 올라갈수록 단풍색깔은 더욱 짙어진다.

마지막 정열을 불사르듯 처절할 만큼 붉어진 잎사귀들,

사랑하는 마음이 간절하면 저런 빛깔이 나올런지?

가슴이 저민다.

 

 

 

몇장의 기록사진을 남기며 기는듯 걷는듯

그래도 정상에 도착하니 11시가 다 되어 간다.

정상기념 사진을 찍느라 분주한 사람들 속에서 나도 잽싸게 한장 찍는데 성공한다.

정상에서 보니 이렇게까지 단풍이 절정이리라 생각을 못했었는데

몇 나무는 벌써 낙엽을 떨구고 앙상해져 있다.

아직도 초가을이라 여기던 의식이 여기서 깊어버린 가을을 만나니 이상하기만 하다.

앞으로 만날 가을을 미리 다 느껴버린 듯 그새 내가 더 늙어버린 기분까지 든다.

 


 

대청봉에서 소청봉으로 가는 중간 넓은 공터에서 

미리 받았던 도시락으로 이른 점심을 먹는다.

올라오면서는 땀이 나 모르겠더니 식은 밥을 먹으며 은근히 한기가 스미는 게

따끈한 국물이 그리워졌다.

아니면 따뜻한 커피라도 한 모금 마시면 참 행복할 것 같았다.

 

 
갈 길이 멀다는 재촉에 다시 일어나 희운각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지치고 힘든데 길은 계속 거친 모습만을 보인 채 조금의 빈틈도 허용치 않는다.

그래서 더 피곤해지는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풍경인 멋지면서도 산책하듯이 부드러운 길은 영 보일 기미가 없다.

"앞으로 악산은 다니지 말아야지!!"

약이 올라 한 마디 하며 그래도 부지런히 걷느라 노력할 수밖에 없다.

어디선가 사고가 났는지 낮게 날으는 헬기를 보며 더 조심한다.

 



그림 속에서나 보았던 공룡능선의 바위들이 코앞에 보인다. 

바위를 감싸고 도는 운해를 배경으로 그 모습은 장엄하리만치 웅장하면서 신비롭다.

웬만하면 하산길을 재촉하고 싶은데 거친 길에서 위험하기도 했지만

이상이 왔는지 다리가 아파와서도 더 걸음을 빨리 할 수가 없다.

왼쪽 다리가 자꾸 아파지니 자연히 오른 쪽 다리에 힘을 싣게 된다.

걸음을 더할수록 오른 쪽 다리에 쥐가 날듯 바들바들 떨리며

나중엔 발바닥이 부르트기까지 한다.

오 하나님!!

 



대청봉에서 비선대에 이르는 천불동계곡은 천개의 불상이 늘어서 있는

형상에서 붙여진 이름이라던가.

기암절벽이 끝없이 늘어서 있는 모습은 정말 만물상이 모여 있는 듯

여러 형상으로 보는 사람의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거기에 바위를 뚫고 자라나 있는 나무들이 색색으로 연출해 내는 아름다움이라니...

저 찬란하고 화려하게 뿜어내는 단풍 색깔들은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다

오늘 이렇게 숨을 막히게 하는가.

그 광경에 압도될 때마다 엉겁결에 따라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힘든 걸 미리 알았다면 절대 안왔을거란 생각도 하면서...

 


 

누군가 우스갯소리로 천불동 계곡은 길이 가도가도 끝이 없는 탓에

가다 보면 속에서 천불이 나 천불계곡이라 했다더니

과연 이 길이 언제 끝날까 싶게 한없이 길기만 하다.

맑디 맑은 계곡물에 손 씻고 족욕까지 하면서 유유자적할 때는

이런 선경에 내가 있다는 것이 꿈결같다가도

걷고 떠 걸으며 힘이 들때는 경치고 뭐고 화가 나기까지 했다.

왜 이런데를 와서 사람 힘들게 하는지 괜히 산악회에 원망하는 기분도 든다.

스스로 자초한 일인데 누구를 원망할 것인가.

내가 생각해도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다.

 


 

세시까지 설악동 제2주차장에 도착해야 하는데

아무리 계산해도 두세시간은 초과될 것 같다.

통화권이탈 지역이라 전화도 안되고 자꾸 마음만 조급해진다.

우리 때문에 많은 인원을 아무 대책없이 기다리게 해야만 되는지,

전화라도 되면 먼저 출발하라고 우린 알아서 가겠다고 전할 수 있을 텐데

멀기만 한 이 길은 그런 아량마저 베풀지 않는다.

 


 

세시 넘어 비선대에 가까이 와서야 간신히 긴급통화를 할 수 있었다.

그것도 SKT만 된다고 내 전화가 유용하게  쓰여질 수 있었다.

일단 통화를 하고 나니 마음의 부담은 덜었는데 또 올라갈 일이 걱정이었다.

남아 있는 다른 산악회 차에 신세 좀 져도 될까.

대중교통을 이용하자니 천근이나 되는 다리가 그걸 배겨낼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더니 우리가 비선대를 지날 무렵 전화기가 울린다.

어디쯤 오느냐고 차 한대는 미리 출발시켰고 나머니 한대가 기다리고 있으니 어서 오라 한다.

어차피 몇 사람은 연착했다지만 꼴찌인 우리 때문에 장장 세시간이 초과된 것이다.

너무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과 이젠 살았다는 안도감에 한숨 돌릴수 있었다.

 


 

너무너무 힘이 든 산행이었기에 누가 대청봉 간다 하면

도시락 싸들고 다니며 결사적으로 말려야지 하다가

이 다음 누군가 대청봉 이야기 하면 나도 거기 갔다 왔지 하며

자랑할 일이 생겼음에 한편으로는 뿌듯해졌다.

이것이 이루어냈다는 성취감이리라.

장장 16시간을 주행하며 이젠 못 오를 산이 없겠다는 용기를 얻었다는 것이

오늘의 가장 큰 수확인 것 같다.

힘은 들었고 아직까지도 온 몸이 맞은 듯 쑤시지만 참 아름다운 산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