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여행기, 풍경

청량산 가는 길

바이올렛~ 2005. 7. 5. 10:14


 

이번 산행은 꼭 가겠노라 일찌감치 선언해놓고

그간 약속 어기는 일 없기를 바라며 일요일을 기다렸다.

그런데 장마로 접어든 날씨가 주말에는 폭우를 예보하며

자꾸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산행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빗속의 산행은 내게 무리겠다 싶어

비가 오면 안가겠다 통보하니 그런 애매모호한 약속이 통하지를 않는지

그래도 나와야 한다는 몇 사람의 반강압적인 이끌림에 의해

결국 비가 와도 가겠노라 결론을 내렸다.

 

토요일 밤 일기예보에서는 그동안 내린 비로 인해 지반이 약해져

산사태의 위험이 있고, 천둥 번개가 칠거라 한다.

겁많은 성격에 또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도대체 어쩌자는 속셈들인지...


일요일, 일찌감치 맞춰놓은 알람시계가 요란히 울려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깬다.

밥하고, 준비물 챙기고, 화장하고 부랴부랴 서둘러 약속된 장소로 나간다.

비오는데 배낭메고 우산들고 새벽같이 나가는 내 모습이 스스로도 웃긴다.

비가 와선지 13명의 인원이 예약을 취소해버렸다고 45인승 버스에

겨우 스물 세명이 타고 간다.

나름대로 가족같은 분위기,

이렇게 해서 경북 봉화에 있는 청량산에로의 여정은 시작됐다.

 

청량산으로 가는 길은 꽤 오지인듯 싶다.

한때는 비포장 도로도 나오고 큰 산줄기를 따라 버스가 계속 달리고 달린다.

차창밖으로 보이는 울창한 여름 산이 빗속에서 온통 푸른 색이다.

초록의 색이 주는 안온함이 비에서 어찌하나 하는 걱정을

조금은 무마시켜 준다.

옥수수 잎새위로 후드득 떨어져 내리는 비...


길 옆으로 노란색 금계국이 한창이다.

이 지방에서 마음먹고 심은 꽃인지 눈부시게 피어

꽤 긴 거리를 장식하고 있다.

어느 밭에선 보라색 도라지 꽃이 막 피어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예전 고향집 곁에서 자주 보던 꽃,

한때는 청초한 아름다움에 반해 내가 제일 좋아하는 꽃으로

자리매김했던 꽃이라선지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

 

담배밭이 많이 보인다.

넓다란 담배잎이 빗줄기 속에서 생각에 잠긴 듯 묵묵히 서있다.

한데 담배에도 꽃이 있었던가, 담배꽃은 처음 본다.

뻣뻣하고 거칠게만 기억되는 담배줄기에 분홍색 꽃이 피었는데

글라디올러스를 닮은 것 같은 모습이 부드럽고 아름답다.

산밑에선 하얀색 개망초꽃이 무리지어 피어있어

꼭 메밀꽃밭을 지나고 있는 것 같다.

비에 씻겨 애잔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개망초꽃의 아련함...

나는 아직도 기다림의 꿈을 꾸고 있는가.


네시간여를 달려 도착한 청량산 입구, 산사태로 길이 통제됐다는 전갈이다.

다른 길로 우회해 1시간 정도 달리는 동안 산을 오르다

산사태를 만나면 어쩌나 하는 불안이 다시 고개를 든다.

꼬불꼬불한 길을 달리는 버스에서 멀미를 느껴

배낭에 머리 기대고 잠들려 노력하는 사이 차는 청량산 아래에 도착했다.

 

아, 너무나 멋진 산의 모습. 신선이 산다는 선계가 저러할까?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자락으로 운무를 두르고 있는

저 산속 어디엔가는 이 세상 모든 욕심을 초월한

무욕의 신선이 살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만큼 산의 모습이 신비롭기 그지없다.

"내가 저 산에 서있으면 선녀가 하강한 거지."

옆사람에게 농담처럼 말한다.

그러나 선녀가 되리라던 나의 허망한 꿈은 바로 무산되어 버렸다.

비는 그치는 듯했지만 위험하다고 입산이 금지되어 있었다.

오늘만 해도 다섯대의 버스를 돌려보냈다 한다.

 

청량산 박물관을 둘러보고, 사진 찍고,

다리밑에서 등갈비가 점심식사겸 해서 구워진다.

빗속에서 멋진 경치와 마주해 등갈비를 구워먹는 맛이란 얻기 힘든 경험이리라.

등갈비를 굽는 옆에 있다가 번개탄이 튀어 깜짝놀라 도망간다.

나중에 보니 불꽃에 맞은 자국이 옷을 몇군데 뚫어 놓았다.

이름짓기 잘하는 간첩은 풀꽃향이 불꽃향됐다고 놀린다.

언제는 술꽃향이라더니...

 

청량산을 끼고 낙동강 상류줄기가 유유히 흐른다.

그동안 내린 비로 다소 탁한 황토색을 띄고

물살이 제법 사나운 기세로 흐르는데

그 물살을 타고 래프팅을 하는 사람들이 내려온다.

바라보는 우리들은 손을 흔들고 수박을 던지고,

어떻게 타는 사람들보다 보는 사람들이 더 신이 났다.

언제 우리도 한번 래프팅하자는 얘기가 나온다.

나도 참석해 봐야지.

 

산자락을 돌아 흐르는 물줄기를 거슬러 혼자 걸어 올라가본다.

물기를 담뿍 담은 산이 유장한 모습으로 나를 내려다 본다.

눈맞춰 인사하며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에 마음을 헹군다.

산에는 못 올라갔지만 오히려 이렇게 곁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실은 내 취미에 맞다.

산을 오르기 한두해 전, 참 많이도 돌아다녔었다.

평소 회색빛 콘크리트의 생활속에 매어 있다

주말이면 좋은 경치를 찾아 나서는 것이 좋았다.

그간의 피로와 복잡한 머리가 자연의 아름다움에 동화돼

마음이 가벼워지고 다시금 현실에서 살아갈 힘을 얻는 듯 했다.

생각해보면 행복했던 추억, 그리운 시간들...


산을 못 오른 대신 안동에 있는 도산서원에 들러서 올라가기로

여러 사람의 의견이 모아진다.

다시 버스를 이동해 도산서원으로 향한다.

우산을 받쳐들고 도산서원으로 향하는 길목에 은사시나무 숲이 보인다.

하얀 줄기에 담녹색 잎을 달고 비를 맞으며 서있는 은사시나무들이

한층 더 상큼해 보인다.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서원이 빗속에 더욱 고즈넉하다.

서 있는 나무들의 수령이 도대체 몇년인가,

지줏대로 줄기를 받쳐 놓은 나무가 몇개 보인다.

하나하나 둘러보고, 사진찍고 버스로 돌아온다.

 

버스를 타고 올라오는 길,

여전히 비는 오고 마음에도 비가 내리는가 가슴이 젖어든다.

빗속에 젖는 저 풍경들이 아름다운 여인의 크고 깨끗한 눈에서 흐르는

맑은 눈물처럼 마음을 적시고 나는 웬지 슬퍼진다.

자연과 비와 내가 하나가 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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