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을 하든 세진은 자신이 하는 일에 혼을 쏟았다.
마늘을 깔 때면 속껍질을 벗겨내는 손길이 마치 마늘을 애무하는 것 같았고,
방바닥에 엎드려 걸레질할 때면 방바닥과 사랑을 나누는 것 같았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길을 걸을 때면 그 길과 간절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보였다.
그 시절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인혜는 그것을 깨달았다.
자신으로부터 등을 돌릴 때조차 세진은 그 행위에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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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혜는 이제 사랑에 대해 어떤 환상도 품고 있지 않았다.
첫 만남에서 어쩐지 낯이 익고, 두 번째 만남에서 동질감을 발견하고,
세 번째 만남에서 운명이나 인연을 거론하는, 그런 사랑의 환상에 대해 알고 있었다.
한때 인혜도 그런 식의 사랑의 환상을 믿은 적이 있었다.
예상치 못한 순간 온몸이 감전되는 전율과 함께 찾아오는 천둥 번개 같은 사랑,
순식간에 사방이 어두워지고 일상과 관습이 사라지는 정전 같은 사랑,
온몸과 마음을 혼곤하게 취하게 하는 봄빛 같은 사랑......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것은 사랑의 다양성이 아니라 환상의 다양성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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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할 때 해발 오백 미터짜리 산도 오르려면 숨이 가쁘고 힘들어요.
그렇지만 히말라야 산도 비행기 위에서 내려다보면 아무것도 아니죠.
한발 물러나서 보면 그래요. 여기서 하는 작업은 그때로 돌아가
그 시절의 감정을 고스란히 되살려내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그 시절에 외면한 고통과 슬픔을 다시 체험해야 한다고 했다.
어떤 사건을 기억해내고, 그 기억에 얽혀 있는 슬픔이나 분노의 감정을 체험하고,
그것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으면 그것과 관련된 억압이나 신경증은 해소된다는 것이다.
모든 신경증은 정면으로 맞서지 못한 고통, 외면하고 회피한 예전의 고통이
뒤에서 다가와 뒤통수를 치는 현상이라고 책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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