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을 낳아 길렀다고 보답을 받는다거나, 언젠가는 저들이 날 호강시키겠지
하는 따위의 염치없는 생각은 하늘에 맹세코 애초부터 눈곱만치도 없었다.
낳아서 기르면 자라나는 모습 그대로가 이미 '보답'이었다.
세상에 태어나 내 피를 받은 누군가가 내 뒤를 이어 다음 세상을 산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고도 영광스러운 일이 아닌가.
그도 없이 누군가의 자식으로 태어나 나를 낳아 준 누군가를 잇는 일조차
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다면 살아온 세월이 그야말로 무가치해질 테니 말이다.
정말이지 지나 보면 모든 게 순간처럼 여겨진다. 아니, 순간이었다.
호의호식도, 찬사와 추앙의 영예도, 원망과 미움도, 심지어는 애절한 그리움이나
사랑이라는 것까지도. 사실 지나고 보면 모두 한 점 스치는 바람과 같은 것들이다.
다만 그런 스치는 바람의 흔적이라도 기억해 주는 이가 있다면, 그때 비로소 살면서
남긴 흔적이 소중하고 두려워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식을 보며 삶에 두려움을 느껴 망설이고 조심하는 게 아니던가.
.
.
손자가 조금 문제이기는 하다. 준걸이 할아비에게 직접 뭐라고 말한 적은 없었다.
그렇지만 돌아가는 사정을 보면 느낌은 있다.
아무래도 그 사람이 제 자식을 두려워하는 눈치이다.
아비에게는 두려워하는 마음보다는 애처로운 마음뿐이던 사람이 자식에게
두려운 마음을 갖는 걸 보면 그건 틀림없이 사랑이 깊어서일 것이다.
나는 모르는 척한다. 무슨 상관이랴.
그처럼 깊은 사랑의 마음이 있는데 자식이 삐뚤어질 일은 없으리라.
또 언젠가는 그 마음도 저절로 알게 될 일이다.
다만 염려스러운 것은 세상 돌아가는 것이 워낙 험해서 아비의 사랑을 알기 전에
무슨 일이 있을까 하는 것이지만 난 하늘을 믿는다.
-돌아보니 그랬다. 지나온 젊음이 모두 허세의 버둥거림일 뿐이었다.
막연히 잘 살아야지, 남들에게 뒤지지 말아야지......
하지만 그게 다 뭔데? 진정으로 간절하지 않은 건 다 헛것이었다.
진정한 목적과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의미 없는 바둥거림이 의미 있는 치열함이 되는 것이고,
그래야 순간이 행복하고 얻은 것도 소중하게 여겨지는데 말이다.
느닷없지만 공부에 게을렀던 게 새삼 한스러웠다.
아마 책 속에는 그런 이야기들이 나와 있을 것이다.
그걸 미리 알았더라면 오늘 이처럼 허망하지는 않았을 텐데.
이제는 제대로 살아보겠다 재삼, 재사, 이를 악 물지만 그렇다고 지나간
허망한 것들에까지 다시 기회가 주어지는 건 아니지 않은가.
아마 그토록 준걸에게 미안하고 두려웠던 까닭도, 아비로서 도무지
자신이 없었던 것도, 그런 내 안의 텅 빔 때문일 것이었다.
-삶은 아무리 힘이 들어도 기대할 것이 있고 의지할 곳이 있으면 두렵지 않은 것이다.
아내에게 준걸은 기대였을 것이고, 아버지는 의지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중 하나가 떠나 버린 것이니 얼마나 허망하고 두려울 것인가.
이제는 자신이 아내의 의지처가 되어야 했다.
아버님만큼 자애롭고 너그럽지는 못하더라도 아픈 눈물은 받아 줄 수 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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