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는 어머니에게 몇가지 약을 처방했다
그는 어머니의 무의식에 자리잡은 억압된 감정과 공포, 분노 따위가
곰에 의해 촉발된 거라며 어머니에게 일주일에 한번씩 심리치료를 받도록 권했다.
낮동안의 어머니는 별 이상 없이 잘 지냈다.
아침이면 기분좋게 일어났고, 끼니마다 음식을 달게 먹었으며,
매일 정원에 앵초를 돌보면서 싸이먼 씨와 우정을 나누었다.
하지만 밤이면 달라졌다. 곰이 올 때쯤이면 현관으로 달려갔다.
-'앵초'중에서-
저녁놀이 방의 모퉁이를 반짝 비추고는 사라진다.
해가 진 뒤의 저녁 어스름이 창을 넘어와 방 안 가득 내려앉는다.
혼자 떠도는 자에겐 가장 위험한 시간이다.
존재가 물에 쓸려나가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알 수 없는 고독이 심장을 가득 채워 마침내 돌덩이처럼 무거워질 때면
어째서 나는 창밖으로 떨어지지 않고 버티는 거지? 하고 스스로 묻곤 한다.
-'폭식'중에서-
제주 유채꽃이 노랗게 피어나더니 이어 오동도 동백꽃,
광양의 매화, 구례 산수유가 시샘하듯 피어났다.
꽃소식이 화개장터를 지나 영취산 진달래 계곡, 벚꽃 흐드러진 진해를 넘어설 무렵엔
장인영감도 더는 참을 수 없었나 보다.
온갖 신세타령에 술주정이 예사가 아니었다.
평생을 좁아터진 가게 지키다가 뒈져버릴 거라는 둥,
마나님도 없는 홀아비 신세가 처량하기 이를 데 없다는 둥,
자식들이라고 하나같이 제 앞가림도 못하는 얼간이라는 둥,
입에 담기 힘든 욕까지 마구 쏟아져나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봄은 꼬리에 불붙은 호랑이처럼 미친 듯이 서울을 향해 달려왔다.
말할 나위 없이 나도 똥줄이 탔다.
-'십오만원 프로젝트'중에서-
'눈길 가는...기록하고 싶은 구절'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네 마음을 보여 줘-박현경 소설집 (0) | 2012.09.04 |
|---|---|
| 삶의 향기 몇점-황동규 산문집 (0) | 2012.08.18 |
| 아침의 문-박민규 (0) | 2012.06.25 |
| 가시나무 숲-송숙영 (0) | 2012.05.29 |
| 나이 듦에 대하여-박혜란 (0) | 2012.05.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