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런 짐도 들지 않은 가벼운 몸이 자꾸만 붕붕 떠오르는 것 같았다.
붕붕 떠올라서 뒤통수에 내리꽂히고 있을 은림의 시선을 따라 뒷걸음질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 계단은 참으로 길었다.
길을 건넌 그가 건너편 길에서 지하도 입구를 바라보았지만 사람들의 무리만 북적거렸을 뿐
누가 누구인지는 구분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은림은 아마도 거기서 오래 울고 있을 거라는 걸,
평소에는 잘 울지 않는 그녀가, 입술을 앙다물고 덜덜 턱을 떨면 떨었지
남 앞에서 울지 않는 그녀가 그 사람들 오가는 왁자한 네길거리에서 울고 있을 거라는 걸.
하지만 돌아설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제 다시 가을이었다.
7년 만에 결국, 가을이 오고, 불쑥, 잊은 줄만 알았던 사람이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다.
그는 창가에 선 채로 다시 담배를 하나 더 꺼내 물었다.
생각해보면 짧은 사랑이었다. 금지된 만남이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아주 짧았던 만남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상처는 더 깊고 날카로웠던 것일까?
-그는 정말 오빠처럼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했지만 사실은 허둥대고 있었다.
비가 내리는 적적한 밤에 난데없이 찾아온 여자에 대해서 그는 사실 설레고 있었다.
어쩌면 외로움 때문이었으리라. 회사에 나가 사람들하고 부딪치는 직업도 아니었고
집에 들어오면 명희가 반겨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 스스로 사람들을 피하기 위해 아무하고도 연락을 안 하고 있었으면서
그는 또 한편 끊임없이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런 밤에 누군가와 둘이서 차를 마실 정도의 즐거움도 나는 가질 수 없는 걸까,
그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참이었을 것이다.
-"아까 응급실에서 비명 지르던 사람들, 남의 일 같지가 않았어.
언제부터인가 나도 그렇게 비명을 지르고 있었던 것 같았던 거야.
아무도 듣지 못했었지만 아주 오래 전부터 그랬던 것 같아.
잠깐 그 비명 소리가 네 것인 거 같은 환각에 빠졌었어."
은림의 목소리는 차근차근했지만 떨리고 있었다.
명우는 은림을 제 쪽으로 끌어당겨 머리를 감싸안았다.
그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
뭉크의 절규라는 그림을 보았을 때처럼 그도 아까 응급실에서 그런 생각을 했었다.
나도 오래 전부터 저렇게 비명을 지르고 있었던 것을 아니었을까 하고.
-여경의 차는 흰 배기 가스를 뿜으며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갑자기 텅 비어버린 주차장에 그는 서 있었다.
드문드문 몇 대의 차가 안개 속에서 무덤처럼 침묵하고 있었다.
갑자기 그는 아주 쓸쓸한 기분이 되었다.
산다는 것은, 이런 안개 낀 밤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아주 가까운 앞과 아주 가까운 뒤만 볼 수 있는 일 같은 것, 아니다,
어쩌면 안개 낀 밤보다 더 뿌연 일이리라.
왜냐하면 산다는 것은 한 치의 앞조차도 보여주지 않는 일이니까 말이다.
산다는 것은 이렇게 안개 낀 밤보다 그러니까 더 지독한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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