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길 가는...기록하고 싶은 구절

바리데기-황석영

바이올렛~ 2012. 4. 2. 12:51

-아버지와 어머니가 결혼을 하게 된 것은 할머니의 성화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대학에 들어간 첫해 여름방학에 노력동원 마치고

일주일 짬을 내어 고향에 돌아오니 웬 처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마니, 시언한 물 한그릇 주시오.

그랬더니 키가 작달막한 단발쟁이가 두 손에 물그릇을 받쳐 들고

부엌에서 나오더라는 것이다.

동문 뉘기요?

물 마실 것도 잊고 아버지가 멍청하게 바라보다 그렇게 물으니 할머니가 대신 대답했다고.

뉘긴, 니 아낙이지비.

소스라치게 놀란 아버지는 그길로 정거장까지 달아나서 평양 가는 기차를 타버렸다.

달포나 지났을까 교무에서 부른다고 하여 갔더니 생활지도를 맡은 주임교원이

볼이 부은 얼굴을 하고 있다가 그에게 턱짓으로 좀 앉으라고 지시했다.

내 동무를 기렇게 안 봤댔는데 아직 학생신분으로 장개까지 들구......

아 기거야 모친이 혼자구 자손이 바르다구 하니끼니 리해할 수는 이서.

긴데 와 아내를 버릴라구 하는지 말해보라우.

아버지는 억이 막혀서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아, 아니 기런 게 아니라, 저어 집에 갔댔는데 갑자기 오마니가 내 아낵이라구 하멘서,

기래서 학교루 돌아왔는데 저어......

 

-할머니의 이야기 중에 장승이와 바리공주의 약속이 생각났다.

길값, 나무값, 물값으로 석삼년 아홉 해를 아들 낳아주고 살림 살아주어야 하는 세월.

나는 사람이 살아간다는 건 시간을 기다리고 견디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늘 기대보다는 못 미치지만 어쨌든 살아 있는 한 시간은 흐르고 모든 것은 지나간다.

 

-내가 이십 파운드짜리 지폐 다섯 장을 내밀자 샹 언니는 돈을 움켜쥐더니 얼른 일어섰다.

너도 바쁘겠지? 내가 다음주까진 꼭 갚아줄게.

그녀는 거리로 나가서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지하철역 쪽으로 뛰어갔다.

내가 길에 서서 한참을 바라보았는데도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아무래도 마음이 편치 않아서 쌀롱의 일이 끝나기 전에 루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내가 샹 언니가 찾아왔다는 얘기를 하고 요즈음 그녀의 사는 형편이 어떤가 하고 물으니

아저씨는 내게 미안하다고 먼저 사과했다.

바리가 보고 싶다고 애걸복걸하기에 할 수 없이 가르쳐주었다.

그애는 허물어질 것 같구나. 아마 약까지 하는 모양이더라.

귀국할 수도 없고 참 딱하지. 내가 그 돈을 갚아주마.

나는 괜찮다고 하면서 아저씨가 도울 수 있는 길이 없겠느냐고 물었는데 아저씨는 한숨만 쉬었다.

스스로 살아갈 의지가 있어야겠지. 그래야 남들도 믿고 도와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