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라는 공간은 시간의 파이프가 물샐틈없이 친친 감긴 기계장치로 둘러싸여 있고,
어딘가 알 수 없는 곳에서 그 파이프로 시간이 공급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데 어느 찰나에 그 시간의 파이프가 아주 잠깐 이탈했었고, 그 짧은 순간
히말라야의 크레바스 같은 끝없이 깊고 좁은 틈 같은 게 생겨났으며,
거기로 소중한 무언가가 빨려들어가서 어딘가 알 수 없는 곳으로 영원히 사라져버린다면.
선로를 이탈한 시간은 문득 휘어졌다가 다음 순간 곧바로 다시 궤도로 들어섰지만,
분명 그전과 같은 시간은 절대로 아닌 것이다.
그애와 내가 각기 다른 시간에 들어서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인지 모른다.
발밑의 땅이 갈라지며 우리를 떼어놓았을 때 나는 결국, 그애의 손을 놓아버렸다.
그렇다, 놓친 것은 아니었다. 뭐랄까, 내 운명에조차 서먹해져버렸달까.
어쨌든 나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애가 대답하며 내 곁을 스쳐 문 쪽으로 걸어간다.
뭔지 모를 서늘하고도 아득한 공기의 떨림.
그리고 순간 최면에 걸린 듯 몸은 소금기둥처럼 굳어버린다.
마리와 그애가 나란히 교지편집실 안으로 사라지자 갑자기 심장박동이 더 커진다.
어깨를 들먹이며 심호흡을 해야 숨을 쉴 수 있을 정도이다.
그래도 나는, 이름표만은 봤다.
급냉동, 그다음으로는 심박동 강화, 세번때 단계는 무중력 체험인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데 갑자기 몸이 가벼워진 느낌이 든다.
발은 평소보다 한 뼘쯤 높이 들리고 그 낯선 에너지를 통제하지 못해 점점 걸음이 빨라진다.
결국은 조금쯤 뛰게 되는군......
갑자기 이대로 마구 달리고 싶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을 때까지. 몸속에서 바람이 느껴진다.
-나는 욕망, 꿈 이런거 없어. 불리한 내 삶을 책임지면서 살 뿐이야.
이런 불리한 조건으로 굳이 시스템 안에 들어가서, 불량품이라고 느끼며 살고 싶지 않아.
나 같은 사람이 자존심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건, 가진 게 그것뿐이기 때문이야.
내가 두려워하는 건 불행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의 존엄이 망가지는 거거든.
근데 나 꼭 말하고 싶었는데, 내가 졌다거나 굴복했다고 생각하지 말아줘. 피한 것도 아니야.
나는 내 방식대로 삶을 선택한 것이고, 거기 당당하다는 것만 알아줬으면 해.
할말은 다 한 것 같으니까 끊을게. 미안해. 더 얘기하면 울 것 같아.
-신민아의 법칙 중 그런 것도 있었지.
방정식이 안 풀리면 책을 덮고 밥을 먹어라.
무조건 붙잡고 끙끙대기보다는 새로운 기분으로 문제에 매달릴 수 있도록
체력을 보충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본다.
연우야 잘 들어. 기분이 좋아진다고 해서 일이 저절로 잘 풀리는 건 아니야.
스스로 일을 잘 풀어가게 되는 거지.
그리고 말야, 서로 사이가 좋아서 가족이 행복한 게 아니라,
각기 제 인생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가족이 사이가 좋아지는 법이야.
그러니까 내가 행복을 찾고 있는 건 너를 위한 일이기도 해. 알겠지?
-모든 관계에는 권력이 생겨나는 법이야. 누가 돈이 더 많은지 더 잘생겼는지.
어느 쪽이 재능이나 능력이 더 뛰어난지.
성장환경, 인격, 행동력, 유머감각, 패션 센스, 그리고 누구 쪽에서 더 감정이 절박한가
하는 것까지도 조건이 될 수 있지. 나이도 그중 하나이고.
사람들은 각자 자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항목에 가산점을 준 다음 그것을 합산하는 거야.
-하나의 공간에 함께 있는 순간에도 어쩌면 우리에게는 각자의 시간이 따로 있어
서로 다른 파이프를 따라 엇갈려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는 건 아닐까.
서로를 향해 달려왔지만, 우리가 가장 가까워지는 순간이란
이제부터 멀어져야 하는 시간이 시작된다는 뜻 아닐까.
불현듯 몸이 노곤해진다. 나에게는 이따금 이런 순간이 있지.
기쁨, 그리고 알 수 없는 불안 다음의 슬픔, 그 끝의 무기력함.
달리는 차 안에서 창밖을 내다본다. 어딘가로 떠나고 있다는 사실이 좋다.
풍경이 바뀌는 것도, 뭔지 조금은 벗어나는 기분이니까.
초겨울의 마른 숲들은 세 계절의 노동을 모두 마치고 쇠약해진 몸을 쉬고 있는 것 같다.
우리나라, 산도 많고 그리고 아파트도 정말 많구나.
산 중턱까지 불쑥불쑥 솟아오른 고층 아파트가 능선의 흐름을 끊어놓아 눈에 거슬린다.
하지만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들, 들판과 숲에 내려앉은 고즈넉한 한낮의 햇빛, 낮은 하늘......
쓸쓸하면서도 차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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