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길 가는...기록하고 싶은 구절

나목-박완서

바이올렛~ 2012. 2. 18. 10:49

-눈이 오는데 누가 우뚝 기다리고 섰다는 건 얼마나 기막힌 축복일까?

이따금 지나가는 육중한 군용 트럭이 비추는 두 줄기의 강력한 빛속에서

눈의 난무가 한층 황홀하게 바라보였다.

 

-한쪽 추녀가 달아난 커다란 한옥은 마치 날개를 잃은 전설 속의 큰 새 같았다.

하늘을 향한 비상을 단념한 새는 쓸모없는 괴물처럼 누워 있었다.

머리끝이 쭈뼛하도록 무서우면서도 이 무서움증을 아무에게도

아직은 덜어줄 순 없다는 오기는 떳떳하고 흡족했다.

나는 긴 골목을 돌격하듯이 달음질쳤다.

 

-나는 고개를 들고, 바로 앞에 갈망과 동경이 서린 앳된 얼굴을 보았다.

나는 그의 갈망이 측은해서 좀 전 내 이마을 짚었던 그의 손을 잡았다.

알맞게 크고 사내답게 단단한 손을 부드럽게 애무했다.

싫지 않은, 어쩌면 상당히 기분 좋기까지 한 감촉이었다.

그렇다고 상대가 반드시 태수여야 할 필요가 별로 없는 그냥 남성이라는

신비한 성이 불의에 나를 유인하고, 나는 부득이 그와의 접촉에 황홀하게 애착했다.

먼저 태수가 내 손 사이에서 자기 손을 빼서 점퍼 주머니에 찌르고

겸연쩍은 듯이 딴 곳을 봤다.

벌겋게 상기한 한쪽 볼을 나는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문득 여벌로 또 하나의 태수가 있었으면 했다.

내가 마음 편하게 무관심할 수 있는 태수와 가끔, 아주 가끔이지만 애착하고

접촉할 수 있는 태수가 따로 있어야 할 것 같았다.

한 사람에게 내 멋대로 애착과 무관심을 변덕스럽게 반복한다는 것은

암만해도 좀 잔인했다.

 

-눈 때문에 어둠도 부옇고 어둠 때문에 눈도 부옇고, 고개를 젖히니

하늘도 자욱하니 별빛을 가로막고 암회색으로 막혀 있었다.

나는 명도만 다른 여러 종류의 회색빛에 갇혀서 허우적대듯 걸었다.

아무리 허우적대도 벗어날 길 없는 첩첩한 회색, 그 속에서도 나는 환상과도 같은,

회상과도 같은 황홀한 빛들을 간직하고 있었다.

완구점 앞에서의 옥희도 씨와의 만남이 그것이었다.

그것은 회상이라기에는 너무도 휘황해서 마치 환상 같으면서도

환상이라기에는 너무도 생동하는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곧 태수와 그의 가족들과 있었던 일은 잊었다.

그것은 그냥 부연 회색의 일부분일 뿐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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