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이 매우 밝아서, 나는 불을 끄고 소파에 누워 빌 에반스의 피아노 연주를 들었다.
창으로 비쳐 들어오는 달빛이 온갖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려,
마치 연한 먹물을 칠한 듯 그윽하게 벽을 물들이고 있었다.
나는 배냥에서 브랜디를 담은 얇은 금속제 물통을 꺼내어, 한 모금 입에 넣고 천천히 삼켰다.
따뜻한 감촉이 목구멍으로부터 위장으로 서서히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따스함은 위에서 몸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갔다.
나는 브랜디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물통 마개를 닫고 그것을 배낭 속에 도로 넣었다.
달빛이 음악에 맞춰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주위는 여전히 고요했다.
셋이 촛불 주위에 둘러앉아 가만히 있으려니까,
마치 우리 셋만이 세계의 끝에 떠밀려 와 있는 것 같았다.
호젓한 달빛 그림자와 흔들리는 촛불 그림자가 하얀 벽에서 겹쳐져 엉기고 있었다.
-나는 묘하게 비현실적인 달빛이 밝혀 주는 길을 따라서, 잡목 숲으로 접어들어
하염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달빛 아래서는 온갖 소리가 야릇한 울림을 내고 있었다.
내 발걸음 소리가 흡사 바다 밑바닥을 걷고 있는 사람의 발걸음 소리처럼,
어딘지 전혀 방향이 다른 곳에서부터 둔하게 들려왔다.
-4월은 혼자서 지내기엔 너무나 외로운 계절이었다.
4월엔 주위 사람들 모두가 행복하게 보였다.
사람들은 코트를 벗어 던진 채, 양지바른 곳에 모여 이야기를 하거나,
캐지볼을 하거나,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완전한 외돌토리였다.
나오코도 미도리도 나가사와 선배도, 모두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멀어져 갔다.
그래서 지금의 나에겐 "안녕" 하고 인사할 상대조차 없었다.
그 '돌격대'마저도 나는 그리웠다.
-4월이 가고 5월이 왔지만 5월은 4월보다 더 가혹했다.
5월이 되자 나는 깊어 가는 봄의 한가운데에서 마음이 떨리고, 흔들리기 시작함을 느껴야만 했다.
그런 떨림은 대개 해질녘에 찾아들었다.
목련 향기가 그윽하게 풍겨 오는 옅은 어둠 속에서, 내 마음은 까닭없이 부풀어 오르고,
떨리고, 흔들리고, 아픔으로 차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그런 느낌들이 지나가기를 기댜렸다.
천천히 오랜 시간이 걸려 그런 느낌은 지나갔고, 그 후에 둔탁한 아픔을 남겨 놓았다.
그럴 때 나는 나오코에게 편지를 썼다.
그녀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근사한 일, 기분 좋은 일, 아름다운 일밖에는 쓰지 않았다.
풀 내음, 상쾌한 봄바람, 달빛, 최근에 본 영화, 좋아하는 노래, 감명을 받은 책,
그런 것에 대해서만 썼다.
그런 편지를 되풀이해 읽으면 나 자신도 위로가 되었다.
어쩌면 난 이렇게 멋진 세계에 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우리는 불완전한 세계에 살고 있는 불완전한 인간들이야.
자로 길이를 재고, 각도기로 각도를 재서 은행 예금처럼 빡빡하게 살아나갈 순 없어.
나의 개인적인 감정으로는, 미도리라는 여자는 아주 멋있는 여자인 것 같아.
와타나베가 그녀에게 마음이 끌리고 있다는 건 편지만 봐도 잘 알겠어.
그러면서 동시에 나오코에게도 마음이 끌린다는 것도 알겠어.
그런 건 죄도 아무것도 아니지. 이 드넓은 세계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니까!
날씨가 좋은 날 아름다운 호수에 보트를 띄우면 호수도 아름답지만
하늘도 아름답다는 것과 다를 게 없어,
그런 식으로 고민하지 말아요.
내버려둬도 만사는 흘러갈 방향으로 흘러가고,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사람은 상처입을 땐
어쩔 수 없이 상처를 입기 마련이지. 인생이란 그런 거야.
-나는 무력해서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슬픔은 깊은 어두움으로 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혼자서 울곤 했다.
운다기보다 마치 땀처럼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이다.
기즈키가 죽었을 때, 나는 그 죽음에서 한 가지를 배웠다.
그리고 그것을 체념으로 익혔다. 혹은 익혔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이런 진리였다.
"죽음은 삶의 대극(對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잠재해 있는 것이다."
확실히 그것은 진리였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동시에 죽음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배워야만 할 진리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나오코의 죽음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은 어떠한 진리도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 슬픔을 실컷 슬퍼한 끝에 거기서 무엇인가를 배우는 길밖에 없으며,
그리고 그렇게 배운 무엇도 다음에 닥쳐오는 예기치 않은 슬픔에는 아루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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