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에 젖는 주왕산
아침 다섯시, 창문으로 빗줄기가 들이친다.
11월 첫째 주일인 오늘은 경북 청송에 있는 주왕산으로
마직막 단풍을 만나러 가는 날이다.
5시 30분, 우산을 받쳐들고 집을 나선다.
온 사위가 잠에 취한채 빗속에 고요하다.
5시 45분, 산악회 버스가 우리 앞에 도착한다.
지난 여름 나를 호되게 고생시켜 겁먹고 한달 이상을 푹 쉬게 했던 주왕산.
그래도 내 맘엔 아직도 너 있으니 우뚝우뚝 솟아있는 기암괴석과
한창일 단풍을 자랑스레 보여주길 소망하면서
두려움 반 기대 반으로 다시 한번 산행길에 오른다.
차창밖으로 내다보이는 풍경들은 아직도 잠을 덜 깬채
내리는 듯 그치는 듯한 빗속에 젖어있다.
낙엽이 져 앙상해가는 나무들과 늦가을의 쓸쓸함이 주는 정경 때문인지
웅크리고 있는 모습들이 왠지 고독하고 슬퍼 보인다.
간간히 남아 있는 은행나무들의 샛노란 잎이 더욱 화려하게 돋보인다.
미리 준비해 두었던 색들을 한꺼번에 분출하듯 물들어 있는 저 눈부신 빛깔...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이 산악회에서 친구가 된 산토끼와 같이 앉아 얘기 나누다
간밤에 잠을 설친 탓으로 한잠 자고 나니 11시 좀 넘어 주왕산 입구에 도착한다.
오늘은 잘 해야지... 각오가 새롭다...
산토끼와 한참을 밀려 있는 화장실에서 일보고 나오니 이게 웬 일?
일행이 아무도 안 보인다. 너무 오래 걸렸나?
그냥 올라가면 되겠지, 먼저 한번 갔었던 데니까 이쯤이야...
속으로 잘난체 하면서 올라갔지만 금방 기죽고 만다.
서너번 가고 나서야 겨우 알아차릴만큼 길눈도 어두운데다
지도 보고 뭘 찾는데는 영 소질이 없어
낯선 사람들만 득시글거리는 빗속에서 당황해진다.
할수없이 장대장님께 전화한다.
매표소에서 좀 올라오다 왼쪽으로 꺾어오란다.
매표소를 지나 이길인가 저길인가 쭈삣쭈삣 올라가는데 워메 반가운거~
갈림길에 고슴도치님이 대기하고 있다가 올라갈 길을 가르쳐 준다.
선두와 40분은 벌어져 있다기에 열심히 올라가느라니 계단길이 왜 이리 힘들어,
헉헉 숨이 차오른다.
전날에의 악몽이 다시 시작되나, 주왕산과는 어쩔수 없이 악연인가 싶다.
힘도 들어하지 않고 40분이나 늦어 있다는 말에
빨리 가고 싶어하는 산토끼를 몇번이나 붙잡아 쉬어가곤 한다.
그래도 다행인건 정상까지만 올라가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완만한 길이란 걸 알고 있으니 참을만 하다는 것.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낙엽이 젖고, 옷도 젖고,
바지 밑자락이 흙탕으로 범벅이 된다.
정상쯤에 오르자 비가 그치며 햇살이 돋는가 했더니
가끔은 성난 듯 바람이 거세지고,
산자락으로 운무가 자욱하며 신출귀몰한게 주왕산이
어디 감히 나를 넘보냐, 약올리는 듯하다.
좀 부드럽게 대해주면 어디가 덧나나?
어렵사리 표도 안나는 정상을 밟고 내려가면서
산토끼가 약이 오르는지 갑자기 위를 향해 소리치기 시작한다.
"웰빙 미워!!"
"우리를 산속에다 버리구 가냐?!"
"그것두 비오는 산에다 버리구 갔지?!"
"이제 같이 안 놀아!!"
"점심두 안 먹어!!"
힘든 고비를 넘긴 나는 한 마디씩 들을때마다 깔깔거리고,
위로 올라가면서 마주치던 사람들도 웃으면서 지나간다.
어떤 아저씨는
"누가 버리구 갔어요? 우리 산악회 따라 오세요." 한다.
이제 하산길이라 편해질만 한데 따라오라면 또 올라가느라 힘들텐데 하며
속으로 와락 겁내고 있는데 산토끼 하는 말
"낯선 사람은 더 무서워서 싫어요." ㅋㅋㅋ
짜알- 햇쓰, 산토끼!!! 속이 다 후련하네 ㅎㅎ...
그렇게 소리지르고 내려가자니 얼마 안가
끝까지 못 마주칠줄 알았던 산악회원들이 간식타임이었는지
모여 있다가 우리를 보고 반긴다.
삐치기로 했던 우리는 그냥 지나치려다
먹을것 앞에 그만 마음 약해져 먹고 삐치자고 못이기는척 합류한다.
과일 몇조각 먹고 다시 힘내서 내려가느라니
약간 가파른 길에 내가 자꾸 미끄러지자 영 어설퍼 보이는지 돌우물님이 손잡아 준다.
앞으로 나올때마다 잘 모시겠다고?
말끝에 최소한 다섯번 이상은 들은 것 같으니 어디 두고 봐야지.
참고로 나는 약속 안 지키는 사람, 특히 약속 안 지키는 남자가 제일 싫다.
괜찮게 생각하다가도 어떤 약속에 이행이 안된다 느껴질 시,
나도 모르게 마음이 싸악~ 싸늘해진다.(누구 들으란 얘기 같네? ㅎㅎㅎ)
제2폭포, 제3폭포, 제1폭포를 차례로 들르면서
해칠이님과 돌우물님이 사진도 찍어주며 아우르는 바람에
아까까지 삐친척(?) 했던 마음을 살짝 내려놓는다.
절정일 거라 행복한 상상을 했던 단풍은 거의 져가고
을씨년스러운 기마저 느끼게 하는 산에 남아 있는 몇개의 단풍이
처연하고 애틋한 모습으로 시선을 끈다.
노란색으로 물들어 있는 침엽수를 보며 저게 낙엽송일까 전나무일까
궁금했던 나무가 있어 돌우물님에게 저거 낙엽송인가요, 물어봤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더니 "메타쉐콰이어 같은데요." 한다.
그러고 보니 우뚝 솟아있는 수형이 메타쉐콰이어 같다.
가로수나 아파트 조경수로만 생각하던 나무가 산에 있으리란 생각을 못했기에
얘기 들으면서 그놈의 고정관념이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메타쉐콰이어에 대한 돌우물님의 설명이 이어지길,
원산지가 중국이고 캐나다에서 개량해 오늘날의 메타쉐콰이어가 됐다 한다.
나무에 대한 지식이 해박해 보인다.
한창 낙엽지는 참나무를 보고서도 갈참나무, 굴참나무, 졸참나무, 또 뭐더라?
네가지 종류가 있다고 말하는데 구분하는 방법을 물으니
그 한가지중에 굴참나무는 껍질이 두껍단다.
샴페인 병에 코르크 마개가 굴참나무 껍질로 만든다 한다.
도대체 무슨 일을 하기에 나무에 대해 잘 아나 싶어 물으니
그냥 관심이 있다보니 알게 된거고 자기는 금융업계쪽에 오너란다.
하산길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마주한 기암괴석들이
어마어마하게 장대한 모습으로 포진하듯 서있다.
세상이 처음 열리는 모습 같다던가?
돌우물님의 표현이 근사해 후기 한번 써 보라고 바람 넣으니
그런 재주는 없다고 극구 사양한다.
어쨌든 이만큼 확실히 띄워드렸으니 앞으로의 소임을 다 하시길...^^
누군가 산은 같은 산이라도 계절마다 틀리고 아침 저녁마다 틀리다더니
그 말이 꼭 맞다.
분명 여름에 본 산이고 바위인지라 너무나 낯익은 모습으로 나를 반기리라던 주왕산은
말도 못하게 낯설고 서먹한 모습으로 나를 대하더니 바위도 그러한 모습이다.
우뚝 솟은 모습으로 위용을 자랑하는 건 여전한데 왜 자꾸 달라 보이는 걸까?
이렇게 가까이에서 무진장하게 큰 바위를 대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사방으로 큰 바위에 둘러싸여 밑으로는 맑게 잠긴 계곡을 보느라니
주변에 많은 사람들만 아니라면 정말 태초에 세상이 처음 열리며
나 혼자 이 세상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을 것 같다.
지금같은 늦가을의 스산함이 주는 이 계절엔 더욱 더...
3시 40분, 주차장에 도착하니 늦은 점심이 제공되고 있다.
70인분의 고기를 50인분에 넣고 끓인 부대찌개라 맛있을 거라고
아침에 장대장님이 자랑하더니 정말 맛이 진하다.
소주 몇잔에 머리가 어지럽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또 잔다.
자꾸 자는 바람에 옆에 앉은 산토끼한테 미안해졌다.
겨울로 향하는 만추의 계절도 깊어가고, 밤도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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