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을 포함한 5일간의 여름휴가 일정이 잡히면서
이번에는 어디 가서 머리를 식히고 올까 생각해 보았다.
전에는 여행 위주의 휴가를 보내다가 작년 여름
친구네와 3일을 계곡 한곳에서 지내 보니 시원하고 편한것 같아
이번에도 그렇게 보내기로 작정했다.
이번엔 친구네와 일정이 맞지 않아 각자 보내게 됐지만 행선지는 작년과 같았다.
강원도 양양의 법수치 계곡,
수려한 경치와 차고 맑은 계곡물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다른 곳을 더 찾아볼까 했지만 귀찮기도 하고 안다는 것의 편안함 이랄까,
그냥 편한 기분으로 쉬다 오자 해서 다시 가게 됐다.
길이 밀리기에 덜 밀리는 국도를 끼고 달려 오후 두세시 쯤
많은 차량과 인파가 북적대는 계곡에 도착했다.
안쪽까지 한참을 들어가 비교적 조용한 곳에 자리 잡고 앉아
맥주를 곁들인 밥에 후식으로 과일까지 먹고는
나무 밑에 자리 깔고 누우니 가슴 가득 평온함이 몰려온다.
맑은 계곡이 흐르는 옆으로 나무들이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 주는데
소나무, 느티나무, 물푸레나무 등 이파리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너무나 평화로워서 그냥 이대로 시간이 멈춰줬으면 싶었다.
눈 돌려 바라본 옥수수밭의 넙적한 옥수수 잎은 또 얼마나 싱그러운지.
문득 머리속으로 한 장면이 떠올랐다.
오래 전 어느 작가의 작품세계를 리포트로 쓸 때 인용했던 구절중
"산"이라는 단편소설에 있던 내용이었다.
젊은 소작농이 지주의 횡포에 분개한 나머지 집에 불을 지르고
후환이 두려워 산에서 숨어 지내며 나무 열매를 따 먹고
낙엽을 긁어 이불삼으며 지내는데 너무나 마음이 편안하더란 그런 내용...
리포트를 쓰면서 그 작가의 소설중 몇가지를 더 인용했을 텐데
다른건 아무것도 생각이 안나고 심지어 작가 이름도 다 잊어버린 마당에
한참의 세월이 흐른 오늘날 불쑥 이 장면이 떠오른다는 건
공감하는 그 무엇이 그때도 있었다는 의미이리라.
그런데 피해야 될 사람도, 쫓아오는 그 누구도 없는데
이런 단절의 세계에 난 왜이리 편안함이 느껴지는 걸까.
그동안 사람들 속에 부대끼며 산다는 것 자체가 불안이었는지 모르겠다.
살면 살수록 산다는 것 자체가 고행인 걸 느낀다.
때때로 눈물겹고, 때때로 실망하고, 때로는 무기력한 삶속에
언젠가부터 느닷없이 밀려드는 허무함으로 쉽게 잠 못 이루던 밤들.
표현하지 않는 아픔, 어쩌면 마음의 감기쯤으로 넘겨버릴 그런 것.
그래도 사람들 앞에서 미소짓는 가면성 우울증 같은 것이 밀려들때면
남들은 무엇을 하고, 무슨 생각들을 하며 한 생을 살아낼까 궁금해졌다.
산중의 어둠은 빠르다.
별도 없이 캄캄한 밤, 온 사위가 고요 속으로 잠겨들어 간다.
이태전 여름, 강변에서 올려다 보던 그 별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손에 잡힐 듯 초롱초롱 빛나는 수많은 별들과 길게 꼬리를 끌며 사라져 가던 유성.
은하수 곱게 흐르던 슬프도록 아름다운 그 밤...
오늘같은 밤은 나뭇잎 사이로 별이 보이고 달빛이 새어든다면 참 영롱할 텐데...
다음엔 달뜨는 시기로 휴가를 잡아 봐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아침이 되니 비가 뿌리기 시작한다.
계곡으로 나뭇잎으로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 나름 운치 있겠지만
장마철의 계곡은 위험하다.
어차피 이리 된거 다른 곳을 둘러 보자 해서 길을 나섰다.
빗줄기는 점점 거세지고 산허리를 뽀얗게 감도는 운무가 신비롭다.
내리는 비에 말갛게 씻긴 산의 청신한 얼굴이
답답하도록 무겁던 마음을 가볍게 씻어주는 것 같다.
멀리서 보니 푸르게 트였던 바다도 회색빛으로 잠겨 있는게 보인다.
온 세상이 빗줄기에 감싸인 강원도의 들과 바다는 그렇게 젖어가고 있었다.
고즈넉한 비의 풍경을 무심히 바라보노라니
끊어질듯 팽팽하던 내 신경줄도 어느새 느슨하게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여행이란 그런 것 같다.
잠시 일상에서 벗어나 다른 곳에서 나를 찾는 과정.
평상시 접해 보지 못한 새로운 자연, 새로운 풍경에 나를 맡기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정화되면서 남루하고 답답한 삶을 다시 살아낼 힘을 얻게 된다.
이번 2박3일간의 여행을 마치고 휴가의 나머지 2일을 집에서 보내면서도
마음이 많이 유순해져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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